한스 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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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베테는 독일 출신의 이론 물리학자로, 원자핵 반응 이론, 특히 별 내부의 에너지 생성에 대한 연구로 196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5년 미국 코넬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베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했으며, 이후 수소폭탄 개발에도 관여했으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1939년 항성 내부의 에너지가 핵융합 반응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혀냈으며, 하전 입자의 에너지 손실에 관한 베테 공식과 원자핵의 결합 에너지에 관한 바이츠제커-베테 질량 공식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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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베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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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한스 알브레히트 베테 |
출생 이름 | 한스 알브레히트 베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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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6년 7월 2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스트라스부르 |
사망일 | 2005년 3월 6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이타카 |
국적 | 독일 미국 (1941–2005) |
로마자 표기 | Hans Albrecht Bethe |
일본어 이름 | ハンス・ベーテ |
학력 및 경력 | |
모교 |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뮌헨 대학교 (박사)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 Theorie der Beugung von Elektronen an Kristallen |
박사 학위 논문 URL | https://worldcat.org/en/title/793769538 |
박사 학위 년도 | 1928년 |
지도 교수 | 아르놀트 조머펠트 |
근무 기관 | 튀빙겐 대학교 코넬 대학교 브리스톨 대학교 맨체스터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
저명한 제자 | 프리먼 다이슨 |
주요 제자 | 미셸 바랑제 데이비드 브리드 비어드 힐드레드 블루엣 피터 A. 카루더스 아조이 가탁 제프리 골드스톤 로만 야츠키프 프랜시스 E. 로 로버트 유진 마샤크 월터 맥아피 보이스 맥대니얼 아소케 나트 미트라 마이클 나우엔베르크 존 W. 네겔 마크 넬킨 라마무르티 라자라만 J. J. 사쿠라이 데이비드 J. 사울레스 |
업적 | |
주요 업적 | 베테 안자츠 베테 공식 베테 격자 베테-슬레이터 곡선 베테-살피터 방정식 베테-파인만 공식 베테-바이츠제커 공식 베테-바이츠제커 과정 모트-베테 공식 공동 섭동 이론 결정장 이론 이중군 항성 핵합성 양자 전기역학 |
알려진 업적 | 베테-살피터 방정식 베테의 식 베테 격자 베테 근사 베테-바이츠제커 공식 |
수상 | |
수상 내역 | 헨리 드레이퍼 메달 (1947) ForMemRS (1957) 프랭클린 메달 (1959) 에딩턴 메달 (1961) 엔리코 페르미 상 (1961) 럼퍼드 상 (1963) 노벨 물리학상 (1967) 미국 국가 과학 훈장 (1975) 로모노소프 황금 메달 (1989) 외르스테드 메달 (1993) 브루스 메달 (2001)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 (2005) |
개인 생활 | |
배우자 | 로즈 에발트 (1939년 결혼) |
자녀 | 2명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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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 | 베테·유리·구로사키 (1985-) |
2. 생애
한스 베테는 1933년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영국으로 피신하여 1935년 미국 코넬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베테는 원자핵 물리학 이론과 실험에 대한 내용들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들은 원자핵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원자핵 물리학에 대한 ‘베테의 바이블’이라고 불렸다.[9][10][11]
1938년 카네기 과학 연구소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열린 이론 물리학 컨퍼런스에서 벵트 스트롬그렌은 태양의 온도, 밀도, 화학 조성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설명하고, 물리학자들에게 설명을 제시하도록 도전했다. 조지 가모프 등은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으로 태양 에너지가 생성된다고 제안했지만, 이는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의 관측을 설명하지 못했다. 베테는 찰스 크리치필드와 함께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을 연구하고, CNO 순환을 발견하여 무거운 별의 에너지 생성 과정을 설명했다. 이 연구는 피지컬 리뷰에 발표되었고, 뉴욕 과학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초대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열린 특별 여름 회의에 참가하여 원자 폭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25]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에 비밀 무기 연구소를 개설했을 때, 베테는 이론 부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베테는 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베테-파인만 방정식'으로 부르는 원자폭탄의 효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만들었고,[14] 1945년 뉴멕시코주의 실험장에서 폭발 실험을 함으로써 계산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베테는 에드워드 텔러와 함께 수소폭탄의 원리가 되는 핵융합 이론도 세웠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베테는 교수로 복귀하여 항성 내부에서 수소가 헬륨으로 융합되는 핵융합반응을 통해 에너지가 생성된다는 이론을 주로 연구했다.[44]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베테는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지만,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전 입장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테는 자신이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며, 자신이 로스앨러모스에 있다면 군축을 위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44] 베테는 수소폭탄 개발 과정에서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에드워드 텔러는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으며, 자신은 조산사 역할을 했다고 비유했다.[44]
1954년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에서 베테는 오펜하이머를 변호하며, 1940년대 후반 오펜하이머의 수소폭탄 개발 반대 입장이 개발을 방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베테는 텔러-울람 설계가 우연의 일치로 이루어진 발전이며, 이전의 아이디어나 인력 배치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베테는 텔러에게 청문회에서 증언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텔러는 동의하지 않았고 그의 증언은 오펜하이머의 보안 자격 박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베테와 텔러의 관계는 영원히 손상되었다.[44]
베테는 1967년 "원자핵 반응 이론에의 공헌, 특히 별의 내부에 있어서의 에너지 생성에 관한 발견"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6] 이후에도 쉘터 아일랜드 회의에 참석하여 램 이동 현상에 대한 계산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양자 전기 역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알퍼-베테-가모 논문에 (비록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이름이 포함되어 우주론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테는 원자핵이 양자 액체 방울과 같다고 믿었으며, 핵 물질 문제, 중성자별, 초신성, 블랙홀 등 이론 천체물리학의 다양한 문제들을 연구했다. 특히 태양 중성미자 문제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썼고, 라이고와 관련된 연구에도 참여했다.
1968년에는 리처드 개르윈과 함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방어 시스템에 대한 비판 기사를 발표하고,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을 위한 과학계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활동했으며, 체르노빌 참사 이후에는 사고 분석 전문가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95년에는 핵무기 개발 중단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썼고, 2004년에는 존 케리를 지지하는 서한에 서명하는 등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7년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4]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 ~ 1933년)
한스 베테는 1906년 7월 2일 당시 독일 제국령 알자스-로렌(Reichsland Elsaß-Lothringen)의 일부였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생리학을 가르치던 사립 강사(Privatdozent) 알브레히트 베테(Albrecht Bethe)와 안나(née Kuhn) 사이의 외동아이였다.[5] 그의 어머니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교수 아브라함 쿤(Abraham Kuhn)의 딸이었고 유대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베테는 아버지처럼 개신교 신앙으로 자랐다.[5] 그는 나중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12년 그의 아버지는 킬 대학교 생리학 연구소의 교수 겸 소장직을 수락했고, 가족은 연구소 소장 관사로 이사했다. 베테는 처음에는 8명의 여학생과 남학생들과 함께 전문 교사에게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1915년 아버지가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의 새로운 생리학 연구소장이 되면서 가족은 다시 이사했다.
베테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김나지움(Goethe-Gymnasium)에 다녔다. 1916년 결핵에 걸려 바트 크로이츠나흐에서 요양을 하면서 그의 교육은 중단되었다. 1917년에는 충분히 회복하여 현지 레알슐레(Realschule)에 다녔고, 이듬해에는 사립 남녀공학 기숙학교인 오덴발트슐레(Odenwaldschule)에 다녔다. 그는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고등학교 마지막 3년 동안 다시 괴테 김나지움에서 공부했다.
아비투어(Abitur) 시험을 통과한 베테는 1924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물리학 교육은 부족했고, 카를 루트비히 지겔과 오토 사스와 같은 저명한 수학자들이 있었지만, 베테는 다른 과학과의 연관성 없이 수학을 제시하는 그들의 접근 방식을 싫어했다. 베테는 실험에는 서툴러 실험복에 황산을 쏟아 망치는 일이 있었지만, 조교수 발터 게를라흐가 가르치는 심화 물리학은 더 흥미롭게 느꼈다. 게를라흐가 1925년 떠나고 카를 마이스너가 그를 대신하여 베테에게 이론 물리학과가 더 나은 대학, 특히 뮌헨 대학교에 가서 아놀드 조머펠트 밑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베테는 1926년 4월 뮌헨 대학교에 입학했고, 마이스너의 추천으로 조머펠트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조머펠트는 베테가 즐거워했던 물리학 미분 방정식에 대한 심화 과정을 가르쳤다. 조머펠트는 저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자주 과학 논문의 사전 인쇄본을 받았고, 매주 저녁 세미나에서 토론을 벌였다. 베테가 도착했을 때, 조머펠트는 방금 에르빈 슈뢰딩거의 슈뢰딩거 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받았다.
박사 논문 주제로 조머펠트는 베테에게 결정에서의 전자 회절을 조사할 것을 제안했다. 시작점으로 조머펠트는 폴 에발트가 1914년에 쓴 결정에서의 X선 회절에 관한 논문을 제안했다. 베테는 나중에 너무 야심 차게 접근하여 정확도를 높이려고 계산이 불필요하게 복잡해졌다고 회상했다. 그가 볼프강 파울리를 처음 만났을 때, 파울리는 그에게 "조머펠트가 당신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의 논문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기대했소"라고 말했다. 베테는 나중에 "나는 파울리에게서 그것은 칭찬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1933년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가 집권하자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2. 2. 유럽에서의 연구 활동 (1928년 ~ 1935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8년 9월, 에르빈 마델룽(Erwin Madelung)의 제안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며 프랑크푸르트에서 조교로 일했다. 1929년에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 공과대학교(Technische Hochschule)로 옮겨, "빠른 입자선의 물질 통과 이론"(Zur Theorie des Durchgangs schneller Korpuskularstrahlen durch Materie)이라는 논문을 썼다.[6] 이 논문은 막스 보른(Max Born)의 슈뢰딩거 방정식 해석을 바탕으로 한 베테 공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1930년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을 위해 제출되었다.1930년,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 장학금으로 캠브리지 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에서 박사후 연구를 수행했다. 패트릭 블랙켓(Patrick Blackett)의 요청으로 베테 공식의 특수 상대성 이론 버전을 만들었다.[7] 구이도 베크(Guido Beck), 볼프강 리즐러(Wolfgang Riezler)와 함께 장난 논문을 만들어 학계를 풍자하기도 했다.
1931년,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의 로마 연구소에서 연구하며 베테 가설(Bethe ansatz)을 개발했다. 1932년에는 뮌헨에서 프라이바트도젠트(Privatdozent)로 일하며, ''Handbuch der Physik''(물리학 편람)에 양자역학 및 금속 내 전자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다.
1932년 튀빙겐 대학교(University of Tübingen) 조교수가 되었으나, 1933년 나치 정권의 직업 공무원 복원법(Law for the Restoration of the Professional Civil Service)으로 인해 해임되었다.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의 도움으로 맨체스터 대학교(University of Manchester) 강사직을 얻어 영국으로 갔다. 루돌프 파이얼스(Rudolf Peierls)와 함께 핵물리학 연구를 시작했으며,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과 모리스 골드하버(Maurice Goldhaber)가 발견한 중수소의 광붕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시했다.[8]
1934년, 코넬 대학교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코펜하겐(Copenhagen)의 닐스 보어 연구소(Niels Bohr Institute)를 방문하여 힐데 레비(Hilde Levi)에게 청혼했으나, 결혼 직전 파혼했다.
2. 3. 미국으로 이주와 코넬 대학교 정착 (1935년 ~ )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피신한 후, 1935년 미국 코넬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9][10][11] 미국으로 이주한 베테는 원자핵 물리학 이론과 실험에 대한 내용들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들은 원자핵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원자핵 물리학에 대한 ‘베테의 바이블’이라고 불렸다.베테는 1935년 2월 미국에 도착하여 코넬 대학교 교수직에 3000USD의 봉급을 받고 임용되었다. 당시 물리학과 학과장이었던 로스웰 클리프턴 깁스(Roswell Clifton Gibbs)는 핵물리학 분야로 진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베테를 임용했다. 깁스는 어니스트 로렌스(Ernest Lawrence)와 함께 일했던 스탠리 리빙스턴(Stanley Livingston)을 고용하여 코넬에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을 건설하게 했다. 팀을 완성하기 위해 코넬은 실험 물리학자를 필요로 했고, 베테와 리빙스턴의 조언에 따라 로버트 바허(Robert Bacher)를 영입했다. 베테는 여러 대학교에서 방문 요청을 받았지만, 깁스는 1936년 베테를 정규 조교수로 임명하고 조만간 교수로 승진시키겠다는 보장을 함으로써 그가 다른 대학으로 스카우트되는 것을 막았다.
바허와 리빙스턴과 함께 베테는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들은 그 당시까지 알려진 핵물리학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비공식적으로 "베테의 성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논문은 수년 동안 이 분야의 표준적인 저술로 남았다. 이 논문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을 채워 넣으며 기존 문헌의 공백을 메웠다. 루미스는 베테에게 일리노이 어바나-샴페인 대학교의 정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코넬은 이 제안에 상응하는 직책과 6000USD의 봉급을 제시했다.
1938년 3월 17일, 베테는 카네기 연구소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의 제4회 연례 워싱턴 이론 물리학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베테는 처음에 컨퍼런스의 주제인 항성 에너지 생성에 관심이 없어 참석을 거절했지만, 텔러의 설득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컨퍼런스에서 벵트 스트롬그렌(Bengt Strömgren)은 태양의 온도, 밀도, 화학 조성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물리학자들에게 설명을 제시하도록 도전했다. 조지 가모프(George Gamow)와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는 1937년 논문에서 태양의 에너지는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proton–proton chain reaction)의 결과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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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의 관측을 설명하지 못했다. 컨퍼런스가 끝날 무렵, 베테는 찰스 크리치필드(Charles Critchfield)와 공동으로 태양이 빛나는 것을 설명하는 일련의 핵반응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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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거운 별의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간과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양성자-양성자 순환이 태양의 과정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최근 태양 중심부의 온도와 광도에 대한 측정 결과는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코넬로 돌아온 베테는 관련 핵반응(nuclear reaction)과 반응 단면적을 연구하여 탄소-질소-산소 순환(CNO 순환)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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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양성자 순환에 관한 논문(크리치필드와 공동 저술)과 탄소-산소-질소(CNO) 순환에 관한 논문은 ''피지컬 리뷰(Physical Review)''에 발표되었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이후 베테의 어머니는 독일에 남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녀는 스트라스부르 출신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1939년 6월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었다. 베테의 대학원생이었던 로버트 마샤크(Robert Marshak)는 뉴욕 과학 아카데미(New York Academy of Sciences)가 태양 및 항성 에너지 주제에 대한 최고의 미발표 논문에 500USD의 상금을 수여한다는 것을 알았다. 베테는 어머니의 가구를 찾기 위해 250USD가 필요했기에 CNO 순환 논문을 철회하고 뉴욕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상을 수상했고, 베테는 마샤크에게 50USD의 사례비를 지급하고 250USD를 사용하여 어머니의 가구를 찾았다. 이 논문은 그 후 3월에 ''피지컬 리뷰''에 발표되었다.
베테는 1939년 9월 13일 파울 에발트의 딸인 로즈 에발트와 결혼했다. 그들은 두 명의 자녀, 헨리와 모니카를 두었다.[32] 베테는 1941년 3월 미국 귀화 시민(naturalized citizen)이 되었다.
2. 4. 맨해튼 프로젝트와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 1945년)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자, 베테는 영국으로 피신하여 1935년 미국 코넬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초대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열린 특별 여름 회의에 참가하여 원자 폭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25]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에 비밀 무기 연구소를 개설했을 때, 베테는 이론 부분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베테는 처음에 우라늄과 같은 무거운 원소의 농축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시카고 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원자로 건설 현장을 본 후 연쇄반응을 이용해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1942년 오펜하이머와 베테가 참석한 이론물리학자 그룹의 토론회에서 핵융합반응의 이용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논의를 하게 되었다. 이후 이론물리학자 그룹에서는 원자폭탄의 구조, 폭발 시 버섯구름의 생성, 충격파의 전파, 발생하는 열량, X선과 방사선의 종류와 양, 충격파의 전파 모양 등 구체적인 폭탄 설계에 필요한 이론적인 계산을 논의했다.
베테는 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베테-파인만 방정식'으로 부르는 원자폭탄의 효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만들었다.[14] 그리고 1945년 뉴멕시코주의 실험장에서 폭발 실험을 함으로써 계산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베테는 에드워드 텔러와 함께 수소폭탄의 원리가 되는 핵융합 이론도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베테는 전쟁에 기여하고 싶어했지만, 시민이 되기 전까지는 기밀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었다. 1941년 12월 보안 허가를 받은 후, 베테는 MIT 방사선 연구소에 합류하여 베테-홀 방향성 결합기를 발명했다.
2. 5. 전후 활동과 수소폭탄 개발 (1945년 ~ 1954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베테는 교수로 복귀하여 항성 내부에서 수소가 헬륨으로 융합되는 핵융합반응을 통해 에너지가 생성된다는 이론을 주로 연구했다.[44]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베테는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지만,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전 입장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테는 자신이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며, 자신이 로스앨러모스에 있다면 군축을 위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44]
베테는 수소폭탄 개발 과정에서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에드워드 텔러는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으며, 자신은 조산사 역할을 했다고 비유했다.[44]
1954년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에서 베테는 오펜하이머를 변호하며, 1940년대 후반 오펜하이머의 수소폭탄 개발 반대 입장이 개발을 방해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베테는 텔러-울람 설계가 우연의 일치로 이루어진 발전이며, 이전의 아이디어나 인력 배치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베테는 텔러에게 청문회에서 증언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텔러는 동의하지 않았고 그의 증언은 오펜하이머의 보안 자격 박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베테와 텔러의 관계는 영원히 손상되었다.[44]
2. 6. 후기 연구 활동과 사회 참여 (1954년 ~ 2005년)
베테는 1967년 "원자핵 반응 이론에의 공헌, 특히 별의 내부에 있어서의 에너지 생성에 관한 발견"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6]
전쟁이 끝난 후 베테는 코넬 대학교로 돌아왔다. 1947년 6월, 그는 쉘터 아일랜드 회의에 참석했다. 미국 국립 과학원이 후원하고 뉴욕주 쉘터 아일랜드의 램스 헤드 여관에서 열린 이 회의는 "양자 역학의 기초"를 주제로 전쟁 후 처음으로 열린 주요 물리학 회의였다. 이는 미국 물리학자들이 모여 전쟁 전에 중단했던 연구를 재개하고 전후 연구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기회였다.[16]
이 회의의 주요 논의 주제는 윌리스 람과 그의 대학원생 로버트 레서포드가 발견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수소 원자의 두 가지 가능한 양자 상태 중 하나가 폴 디랙의 이론이 예측한 것보다 약간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램 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와 바이스코프는 이것이 전자기장의 양자 요동의 결과이며, 이것이 전자에 더 많은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제안했다. 전쟁 전의 양자 전기 역학(QED)에 따르면, 전자의 에너지는 전자기장과 결합되지 않았을 때 가지는 고유 에너지와 전자기 결합으로 인한 자체 에너지로 구성되지만, 전자기장을 끌 수 없기 때문에 둘 다 관찰할 수 없었다. QED는 자체 에너지에 대해 무한한 값을 제공했지만, 램 이동은 그것들이 실제적이고 유한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스 크라머스는 해결책으로 재규격화를 제안했지만, 아무도 계산 방법을 몰랐다.[16]
베테는 뉴욕에서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일하고 있던 스케넥터디로 가는 기차에서 계산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것이 비상대론적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계산을 크게 단순화했다. 고유 에너지는 이미 관측된 전자의 질량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제거되었다. 자체 에너지 항은 이제 선형적으로 증가하는 대신 로그적으로 증가하여 수학적으로 수렴하게 되었다. 베테는 램 이동에 대한 값을 1040 MHz로 계산했는데, 이는 람과 레서포드가 실험적으로 얻은 값과 매우 가까웠다. 1947년 8월 ''피지컬 리뷰''에 발표된 그의 논문은 단 3페이지에 불과했고 수학 방정식은 12개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무한대는 QED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으며 새로운 급진적인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추정되었지만, 베테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16]
베테의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는 그가 직접 쓰지 않은 1948년 알퍼-베테-가모 논문이다.[17] 조지 가모프는 베테가 신경 쓰지 않을 것을 알고, 랄프 알퍼의 의사에 반하여 베테의 이름을 (결석 상태로) 추가했다. 이것은 그리스 알파벳의 처음 세 글자처럼 들리는 논문 제목을 갖고 싶어하는 가모프의 유머 감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피지컬 리뷰''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베테는 원고를 보고 "결석 상태로"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베테는 원자핵이 양자 액체 방울과 같다고 믿었다. 그는 케이스 브루크너가 수행한 섭동 이론에 대한 연구를 고려하여 핵 물질 문제를 조사했다. 제프리 골드스톤과 함께 무한한 단단한 코어 포텐셜이 있는 경우에 대한 해를 제시했다. 그런 다음 베어드 브랜도우와 앨버트 페체크와 함께 산란 방정식을 쉽게 풀 수 있는 미분 방정식으로 변환하는 근사치를 제시했다. 이는 그에게 루드비히 파데예프의 3체 산란 접근 방식의 일반화인 베테-파데예프 방정식으로 이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여 핵과 유사한 밀도를 가진 중성자별을 조사했다.
베테는 90대 후반까지 초신성, 중성자별, 블랙홀 및 이론 천체물리학의 다른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토니 브룩 대학교의 제럴드 E. 브라운과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1978년 브라운은 초신성에 대한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이는 당시 상당히 잘 이해되었지만 계산은 여전히 문제였다. 핵물리학 연구 수십 년의 경험과 핵폭발과 관련된 계산 경험을 바탕으로 베테는 항성 중력 붕괴와 다양한 요인이 초신성 폭발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했다. 다시 한번 그는 문제를 일련의 미분 방정식으로 축소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18]
85세에 베테는 태양 중성미자 문제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이론과 실험 사이의 난해한 불일치를 설명하기 위해 스타니슬라프 미헤예프, 알렉세이 스미르노프 및 린컨 울프슈타인이 제안한 전자 중성미자가 뮤온 중성미자로 변환되는 메커니즘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베테는 중성미자가 질량이 없고 따라서 서로 변형될 수 없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표준 모형을 넘어서는 물리가 태양 중성미자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MSW 효과는 이것이 일어나야 했다. 베테는 온타리오주 캐나다에 있는 서드베리 중성미자 관측소(SNO)에서 90세 생일에 확인 증거가 발견되기를 바랐지만, 95세가 되기 직전인 2001년 6월까지 SNO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다.[19]
1996년 킵 손은 중성자별과 블랙홀의 합병에서 발생하는 중력파를 감지하도록 설계된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인 라이고에 대해 베테와 브라운에게 접근했다. 베테와 브라운은 볼 수 없는 것을 계산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합병을 조사할 수 있을까? 90세의 베테는 즉시 열정을 보였고 곧 필요한 계산을 시작했다. 그 결과 브라운이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 "합병하는 쌍성 밀집 천체의 진화"라는 1998년 논문이 나왔다.[20]

1968년, 베테는 IBM 물리학자 리처드 개르윈과 함께 미국 국방부가 제안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방어 시스템에 대한 비판 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에서 두 물리학자는 미국이 취하는 거의 모든 조치가 비교적 간단한 미끼를 사용하여 쉽게 무력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21] 베테는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 체결을 위한 과학계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으며, 이 조약은 대기 중 핵무기 실험을 금지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베테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활동했다. 체르노빌 참사(Chernobyl disaster) 이후 베테는 이 사고를 분석한 전문가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원자로가 근본적으로 결함 있는 설계를 가지고 있었고 인적 오류 또한 사고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저와 제 동료들은 체르노빌 참사가 원자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소련의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의 결함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22] 베테는 일생 동안 원자력 발전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1977년에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언급했다.
1980년대에는 다른 물리학자들과 함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가 구상한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미사일 시스템에 반대했다. 1995년, 88세의 나이에 베테는 모든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 및 제조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썼다.[23] 2004년에는 다른 47명의 노벨상 수상자(Nobel laureate)들과 함께 서한에 서명하여 존 케리(John Kerry)를 미국 대통령으로 지지했는데, 그는 "과학을 정부의 적절한 위치에 회복시킬" 사람이라고 했다.[24]
1957년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4]
3. 주요 업적
베테는 다양한 주요 업적을 남겼다.[45] 그 중에서도 1939년에 항성 내부 에너지가 핵융합 반응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외에도 하전 입자의 에너지 손실에 관한 베테 공식, 원자핵의 결합 에너지에 관한 바이츠제커-베테 질량 공식 등이 있다.
바허, 리빙스턴과 함께 핵물리학에 대한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9][10][11] 이 논문들은 당시까지 알려진 핵물리학 지식의 대부분을 요약하여 "베테의 성경"으로 불렸으며, 수년 동안 이 분야의 표준적인 저술로 남았다.
알파-베타-감마 이론은 지인인 조지 가모프의 제안에 따라 명의만 빌려준 것이다.
이러한 원자핵 반응 이론에 관한 일련의 업적으로 196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전후 램 시프트에 대해 비상대론적인 근사이지만 매우 정확한 계산을 이끌어내어, 제자인 리처드 파인만, 프리먼 다이슨 등에 의한 양자전기역학의 완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차원 양자계의 엄밀해를 구하는 방법인 베테 가설(Bethe ansatz)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하이젠베르크 모형의 엄밀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오늘날에는 초끈 이론에서 초전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46]
만년에도 왕성한 연구 의욕을 보였으며, 80대였던 1990년에도 태양 중성미자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논문을 남겼다.[46]
3. 1. 항성 핵융합 이론
1967년 "원자핵 반응 이론에의 공헌, 특히 별의 내부에 있어서의 에너지 생성에 관한 발견"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9] 베테는 항성 내부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수소가 뭉쳐 헬륨이 되는 핵융합반응을 통해 생성된다는 이론을 주로 연구했다.[9]1938년 3월 17일, 베테는 카네기 연구소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제4회 연례 워싱턴 이론 물리학 컨퍼런스에 에드워드 텔러의 설득으로 참석했다. 벵트 스트롬그렌은 태양의 온도, 밀도, 화학 조성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물리학자들에게 설명을 제시하도록 도전했다. 조지 가모프와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는 1937년 논문에서 태양의 에너지는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의 결과라고 제안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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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의 관측을 설명하지 못했다. 컨퍼런스가 끝날 무렵, 베테는 찰스 크리치필드와 공동으로 태양이 빛나는 것을 설명하는 일련의 핵반응을 제시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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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거운 별의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간과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양성자-양성자 순환이 태양의 과정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최근 태양 중심부의 온도와 광도에 대한 측정 결과는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12] 코넬로 돌아온 베테는 관련 핵반응과 반응 단면적을 연구하여 CNO 순환을 발견하게 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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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자-양성자 순환에 관한 논문(크리치필드와 공동 저술)과 CNO 순환에 관한 논문은 ''피지컬 리뷰''에 발표되었다.[12]
베테의 대학원생이었던 로버트 마샤크는 뉴욕 과학 아카데미가 태양 및 항성 에너지 주제에 대한 최고의 미발표 논문에 500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는 것을 알았다. 베테는 CNO 순환 논문을 제출하여 상을 수상했고, 그 후 논문은 ''피지컬 리뷰''에 발표되었다. 이것은 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이었으며, 1967년 베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주었다.[12]
3. 2. 베테 공식
막스 보른의 슈뢰딩거 방정식 해석을 바탕으로, 베테는 푸리에 변환을 이용하여 충돌 문제에 대한 단순화된 공식을 만들었는데, 이를 베테 공식이라고 한다.[6] 패트릭 블랙켓의 요청으로, 안개상자를 연구하던 블랙켓을 위해 베테는 베테 공식의 특수 상대성 이론 버전을 만들었다.[7] 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원자폭탄의 효율을 계산하는 베테-파인만 방정식을 만들었고, 1945년 뉴멕시코 주 실험장에서의 폭발 실험을 통해 계산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하전 입자의 에너지 손실에 관한 공식도 베테 공식이라고 불린다.3. 3. 베테-파인만 방정식
베테는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과 함께 원자폭탄의 효율을 계산하는 공식인 ‘베테-파인만 방정식'을 만들었다.[45] 1945년 뉴멕시코 주에서 진행된 폭발 실험을 통해 이 공식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3. 4. 램 시프트 계산
베테는 뉴욕에서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일하고 있던 스케넥터디로 가는 기차에서 램 시프트 계산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것이 비상대론적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계산을 크게 단순화했다. 고유 에너지는 이미 관측된 전자의 질량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제거되었다. 자체 에너지 항은 이제 선형적으로 증가하는 대신 로그적으로 증가하여 수학적으로 수렴하게 되었다. 베테는 램 이동에 대한 값을 1040 MHz로 계산했는데, 이는 윌리스 램과 로버트 레서포드가 실험적으로 얻은 값과 매우 가까웠다. 1947년 8월 ''피지컬 리뷰''에 발표된 그의 논문은 단 3페이지에 불과했고 수학 방정식은 12개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무한대는 양자전기역학(QED)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으며 새로운 급진적인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추정되었지만, 베테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16]3. 5. 베테 가설
베테는 1차원 양자계의 엄밀해를 구하는 방법인 베테 가설(Bethe ansatz)을 도입하였다. 이는 하이젠베르크 모형의 엄밀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오늘날에는 초끈 이론에서 초전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46]4. 수상 내역
Hans Bethe영어는 생전과 사후에 수많은 상을 받았다.
연도 | 상 이름 |
---|---|
1947년 |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28] |
1947년 | 헨리 드레이퍼 메달[29] |
1947년 | 미국 철학 학회 회원[30] |
1955년 | 막스 플랑크 메달 |
1957년 | 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1] |
1959년 | 프랭클린 메달 |
1961년 | 왕립 천문학회 에딩턴 메달 |
1961년 | 미국 원자력 위원회 엔리코 페르미 상 |
1963년 | 럼퍼드 상[31] |
1967년 | 노벨 물리학상[32] |
1975년 | 미국 과학 메달[33] |
1978년 | 독일 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 회원[38] |
1985년 | 버네바 부시 상 |
1989년 | 로모노소프 금메달 |
1990년 | 오스카르 클라인 메달 |
1993년 | 외르스테드 메달[34] |
1993년 | 왕립 학회 베이커 강연[37] |
2001년 | 브루스 메달[35] |
2005년 | 벤자민 프랭클린 메달[36] |
코넬 대학교는 저명한 전 교수진의 이름을 딴 다섯 개의 새로운 기숙사 중 세 번째를 그의 이름을 따 한스 베테 하우스로 명명했다.[39]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을 딴 한스 베테 센터(워싱턴 D.C. 4번가 NE 322번지)는 베테가 오랫동안 이사회 멤버로 있었던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한 협의회의 본거지이다.[40] 독일 본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 베테 센터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41] 1990년에 발견된 소행성 30828 Bethe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42] 미국 물리학회의 한스 베테 상 또한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43]
5. 같이 보기
- 베테 격자
- 파울 페터 에발트 (장인)
- 베테·유리·쿠로사키 (외손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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